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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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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ajfieo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4-22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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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운데)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자녀 근혜 근령 지만과 함께 1966년 11월에 찍은 가족사진. 정부기록사진집 1975년 2월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공무원 같은 단정한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은 처음엔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다 “기도를 많이 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일해 보고 싶다”며 자신들이 청와대에서 왔다고 했다. 누군가 나를 추천했다고 하면서도 그 추천인이 누구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삼각산에서 내려온 뒤로 친척은 물론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형부조차 만나지 않았기에 나를 추천할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에게 늘 맞고 살아 눈두덩이가 멍든 채 지내던 나는 가족 친척 친구를 피해 다녔다. 어머니에게조차 “요년아”라는 말과 함께 외면당했다. 이혼은 곧 수치였고 어디 가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삼각산에 있을 때도 그 이후에도 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돈 1원도 꿔본 적 없었다.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삼각산에서든 교회에서든 그저 엎드려 기도하는 것뿐이었는데, 청와대 관계자가 어떻게 나를 알게 된 걸까.추측하건대 내가 발탁된 데는 인사 검증 과정에서 확인했을 내 가족 배경이 한몫했을 것이다. 사촌 형부는 차관보 출신 변호사였고 이종사촌 형부는 시중은행의 은행장이었다. 막내 숙부는 서울의 한 대학교 교수였다. 이혼이라는 개인사는 오히려 가족 연결 고리가 없다는 점에서 장점으로 평가됐을지 모른다.인사 검증을 통해 내 배경이 안전하고 그럴 듯하다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정작 나는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초라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일 시켜 먹기엔 괜찮은 종’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청와대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기도하신 분의 추천이었다”고 들은 것이 전부였다.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이후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려는 정국은 사실상 계엄 상태와 다름없었다. 1974년 광복절에는 영부인의 서거라는 비극이 더해졌다. 국민의 동정 여론이 형성됐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은 여전히 계속됐다.영부인 서거 후 영애 근혜(박근혜 전 대통령)와 두 동생을 보살피고, 근혜의 대외 활동을 도울 사람이 필요했다. 청와대는 그들의 보모로 들어올 ‘어디에 내세워도 문제없고 믿을 만한 인물’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때 내 나이 마흔 살이었다.그들과 ▲ 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현지시간), 선종했다는 소식에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은 아버지를 잃은 것과 같은 큰 슬픔에 휩싸인 채 영원한 안식을 기도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습니다. 로이터, AFP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성당에선 88세를 일기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기리는 특별 미사가 거행됐습니다. 미사가 열린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진과 꽃다발이 장식됐고, 일부 시민들은 성당 밖에서 촛불을 밝히며 교황을 애도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때 대주교를 지냈던 곳입니다. 호르헤 가르시아 쿠에르바 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는 미사에서 "가난한 이들의 교황, 소외된 이들의 교황이 우리를 떠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쿠에르바 대교구장은 "교황은 우리의 아버지,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셨다"며 "우리 아르헨티나인들이 프란치스코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는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한다고 밝혔습니다. 한때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던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교황의 선종에 애도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밀레이 대통령은 "사소해 보이는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선함과 지혜를 알게 된 것은 내게 진정한 영광이었다"며 "성부께 작별을 고하며 오늘 이 슬픈 소식을 접한 우리 모두와 함께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교황은 주교와 추기경으로 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촌 사목에 힘썼습니다. 마약이 유통되고 폭력이 흔한 우범지대여도 교황은 개의치 않고 동행하는 사람 없이 빈민촌을 찾았습니다. 1천282년 만의 비유럽권이자 최초의 신대륙 출신 교황인 그는 역대 교황 중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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