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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3-19 01:03
향신료의 왕 '후추'
 글쓴이 : 강은지 (125.♡.32.22)
조회 : 2,219  
향신료의 왕 ‘후추’, 세계를 재편하다송의근

향신료의 왕 ‘후추’

세계를 재편하다

[출처: 글마루3월호]

 


음식에 풍미를 더해 식욕을 촉진시키는 ‘향신료’. 고추, 후추, 마늘, 겨자, 생강, 계피, 정향, 육두구 등의 향신료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식품이다. 향신료가 지금은 이렇게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식품이지만, 15세기경 유럽에서는 금과 견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향신료의 왕으로 통하던 ‘후추’라는 작은 열매가 신세계를 열었고, 세계를 재편했다는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15~17세기 초반까지를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데, 당시 유럽 국가들을 바다로 이끈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이 ‘후추’라는 향신료다. 후추가 귀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후추는 단순한 식품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치료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 의약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후추에 부패 방지 효능이 있어 미라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후추, 유럽인을 바다로 이끌다

 


대항해 시대하면 가장 먼저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알린 콜럼버스를 떠올릴 것이다. 콜럼버스는 왜 바다로 향했을까? 오늘날과 달리 당시 사람들에게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냉장고도, 통조림과 같은 가공 기술도 없던 시대에 많은 먹거리가 필요했던 장거리 항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항해를 하기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를 비롯한 많은 모험가들이 당시 바다로 향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후추’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인도에서 건너온 후추의 이국적 향미에 매료됐다. 고기가 주식이었던 유럽 사람들에게 후추의 맛은 신세계였다. 후추가 육류의 누린내와 생선 비린내를 없애주고 좋은 향이 나도록 해 식욕을 자극했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고기가 쉽게 변질되는 것을 막아줬다. 이에 중세의 왕족과 귀족 등 부유층들은 후추에 열광했고 후추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후추 값이 오를 수밖에 없는 데는 유통의 문제도 큰 몫을 했다. 후추가 유럽에 유통되려면 인도 상인과 이슬람 상인, 베네치아 상인까지 적어도 3번 이상의 유통 단계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후추 값은 점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5세기 초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방해 때문에 지중해 일대의 후추 무역에 제동이 걸렸다. 심지어 1453년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뒤 아예 무역을 금지해버려 유럽에 후추의 유통이 불가능해졌다. 이에 유럽 국가에서는 인도에서 바로 후추 등의 향신료를 들여오기 위해 바다로 향했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먼저 엔리케 왕자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뱃길, 인도양 항로 개척에 성공했다. 포르투갈은 인도의 후추를 독점해 유럽 국가에 판매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포르투갈과 라이벌 관계인 에스파냐는 포르투갈의 성공적 항해 소식에 위기감을 느껴 콜럼버스를 통해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척하고자 했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세계지형을 알고 있는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땐 너무도 터무니없는 사실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콜럼벗는 자신이 도착한 현재의 아메리카대륙을 인도로 착각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그 땅에서 금과 은을 갖고 금의환향했지만, 정작 원했던 후추는 얻지 못했다.

 


 


식재료·의약품·방부제 등 다양한 얼굴의 ‘후추’

 


향신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800년에 쓰인 이집트의 파피루스 기록과 기원전 2200년경의 수메르의 점토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허브와 몰약, 유황, 육계, 계피 등과 같은 향신료를 사용했으며, 제의용으로 많이 쓰였다. 당시 향신료는 종교의식 때 향불을 피우는데 사용했다. 고대 사람들은 향신료가 인간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집트에서 후추는 시신을 방부 처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1224년에 죽은 람세스 2세의 코에서 사망 후에 넣어둔 여러 개의 후추 열매가 발견되면서 후추가 방부제로 쓰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람세스 이후로는 사람이 죽으면 향료를 넣은 무덤에 묻었다. 565년 비잔틴제국의 시인 코리푸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시신을 향유, 몰약, 꿀로 방부 처리한 다음 100여 가지의 향료와 불가사의한 연고를 그 안에 넣어 황제의 신성한 시신을 영구히 보존했다’고 기록했다.

후추는 1세기의 로마인, 13세기의 중국인, 16세기의 유럽인 등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인도로 향하게 했다. 페르시아를 통해 지중해로 전해진 후추는 기원전 4세기경 의약품으로 쓰였으며, 로마인들에 의해 양념으로써의 진가를 발휘했다. 특히 로마인들은 거의 모든 요리에 후추를 넣어서 먹을 정도로 후추에 열광했으며, 그 사용량도 어마어마했다. 플리니우스는 <박물지>에 “아주 적게 잡아도 인도, 중극 그리고 아랍이 우리 제국으로부터 빼가는 돈이 1년에 1억 세스테리우스(고대 로마의 은화)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후추 열풍은 로마의 쇠퇴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되고,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제국을 중심으로 양념으로 정착해 나가게 된다.

후추는 인도에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전해진다. 중국 <후한서>에는 “서방의 이란인들이 전했다는 뜻을 담은 ‘호’에, 매운맛이 있는 과실이라는 뜻의 ‘초’가 합쳐진 ‘호초’”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후추의 효능을 설명한 <신수본초>에는 음식을 조리하는데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소화를 돕고 설사를 치료하는데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국은 인도의 말라바르 지방까지 진출해 후추를 수입했지만 급속하게 증대된 수요를 충족시키기 힘들었다. 7세기경 중국은 인도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후추가 재배되고 있는 자바에 눈을 돌리게 되고, 자바와의 후추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상인들이 동전을 대량으로 수출해 동전부족 현상이 빚어졌다. 이에 중국 정부는 후추 무역을 금지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후추의 향미는 조선 사람들도 사로잡았다. 후추는 통일신라 때까지도 귀한 식품이었으며, 고려시대에 오면서 후추 수입이 늘어났다. <고려사>에는 1389년 유구국에서 후추 3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조선의 성종은 후추 씨앗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후추 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컸기 때문에 후추 소비량이 큰 중국에 후추를 직접 생산해 팔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후추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후추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의약품, 제의용, 방부제 등 고대부터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으며, 그 몸값도 금이나 노예 1명과 맞먹을 정도로 높았다. 또한 후추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에 각국에서는 후추를 차지하기 위한 열정에 불타올랐고, 그 열정과 욕망은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