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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19 23:34
[글마루]독립운동가 지도자 남강 이승훈
 글쓴이 : 이승희 (121.♡.201.38)
조회 : 2,454  
도산은 “옛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힘을 길러야 하며, 새로운 힘을 기르기
위해 새로운 교육을 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그 평양 연설회 자리에 43살
된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음 날 상투를 자르고 도산을 찾아가 만났다. 이 만남이 그 남자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삶을 180도로 바꾸었다.



1907년 7월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시국연설회가 있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을 구하고자 국내에 들어온 도산은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신민회를 조직하고, 각지로 다니며 연설회를 열고 있었다. 도산은 “옛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힘을 길러야 하며, 새로운 힘을 기르기 위해 새로운 교
육을 해야 한다”고 절규했다. 그 평양 연설회 자리에 43살 된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다음날 상투를 자르고 도산을 찾아가 만났다. 이 만남이 그 남자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삶을 180도로 바꾸었다. 그때까지 그의 목표는 가난의 고통에서 벗어 나기 위해 악착같이 돈 벌고 벼슬을 사서 가문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 이후 자신이 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강은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다. 평북 정주의 용동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당을 고쳐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는 신식 초등교육 기관을 열고, 그해 12월에는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또한 그동안 해온 사업 경험을 살려 신민회의
산업부문인 식산흥업의 책임자를 맡아 평양 마산동에 자기(磁器)회사를 설립하였고, 서적 출판과 공급을 위한 태극서관이라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남강은 33인 민족대표 중 기독교계를 대표한 인물로서 3·1운동의 산파역을 했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
때 동아일보 사장을 한 언론사 경영자였고, 1930년 5월 9일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는 자신의 시신마저도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표본으로 기증할 것을 유언할 만큼 아낌없이 조국과 학생들을 사랑한 교육자요 애국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의 성장과정은 따뜻한 부모의 양육과 정규교육 같은 것과 거리가 멀었다. 1864년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자라던 남강은 아홉 살 때 할머니와 아버지마저 여의어 천애의 고아가 되었다. 그는 큰 유기공장을 하는 임일권이라는 사람의 사랑방 심부름꾼으로 보내졌다. 그런 역경이 노동, 성실과 정직,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는 학교에서 배우기 어려운 인생의 원리들을 굳은살처럼 그의 몸에 배게 했는지 모른다.

작은 심부름도 성실하고 부지런히 한 끝에 인정을 받아 4년 뒤에는 이 상점의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14살 남강은 1878년 이도제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결혼하고서도 남의 집 사환 노릇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남강은 유기그릇을 받아 지고 장터를 도는 보부상이 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며 돈을 모으게 되자 납청정에 유기상점을 차렸다. 사업은 번창했다. 얼마 후 평양에 지점을 설치하였고, 철산의 갑부 오희순에게서 자본을 빌려 1887년 24살 나이에 납청정에 유기공장을 세웠다. 제조와 판매, 지방 도산매를 겸하여 번창하던 중 청일전쟁이 터졌다. 평안도가 전쟁터가 되었다. 3년 동안 피난을 하고 돌아 왔을 때 남은 것은 잿더미로 변한 공장과 빚더미뿐이었다. 남강은 빚을 준 철산 오씨를 찾아갔다. 이제까지 빚의 원금과 이자를 상세하게 뽑은 문서를 보이며, “전쟁으로 거지가 되었으니 다시 한 번 자본을 빌려 주면 묵은 빚까지 다 갚겠다”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오씨는 문서에다 먹줄을 죽 그어버리고 “본전만 갚으라”며 새로 2만 냥을 빌려 주었다. 남강이 후에 이자까지 깨끗이 갚은 것은 물론이다. 그후 수년 간 사업이 번창하여 평양과 인천에 본거를 두고 마침내 전국 제일의 무역상이 되었다.

 
1902년 1만냥의 엽전을 싣고 부산으로 가던 남강의 운송선이 일본 영사관 소속의 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 일본 영사를 상대로 2만 냥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루한 소송은 1년이나 걸려 겨우 원가만 받게 되었다. 그 동안 소송 때문에 사업을 못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남강은 사
업을 접었다. 그리고 왜,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흔들리는 국권의 문제가 있었고, 일본의 침략이라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 연설회에 참석한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자기만 잘 사는 것이 다가 아니며, 나라가 편안하고 부강해야 개인도 잘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육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확신한 남강 이승훈은 온힘과 정성을 오산학교 경영에 쏟았다. 남강 이승훈이 보여준 몇 가지 지도자의 특징적 면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솔선수범

남강은 오산학교 설립자요 교장으로서 학교 일을 위해 외부 일을 보지 않을 때는 학교에서 선생들과 학생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으며, 같이 일하고 배웠다. 그는 뜰을 쓸고 변소를 손수 치우고, 헐은 데를 고쳤다. 그는 학생들의 이름을 잘 기억했고, 학생들과 만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언제나 교사와 학생을 다정한 가족으로 대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학교를 돌아보던 남강은 변소에 대변 무더기가 얼어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남강은 도끼를 가지고 와서 언 변 무더기를 깨 내었다. 그러한 남강의 정신이 학생들에게 퍼져나가 오산학교는 “헌신의 불도가니”가 되었다.


 

1911년 일제가 신민회의 만주 무관학교 설립 운동과 관련지어 남강을 제주도에 유배했다. 유배지에서 남강은 일찍 일어나 동리를 깨끗하게 쓸고 어린아이들의 코를 닦아 주고, 옷고름을 매어 주었다. 이런 솔선수범이 주민들의 관심을 끌자 남강은 집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 부지런히 일할 것을 가르쳤고, 동네 청년들을 모아 우물을 깨끗하게 치우기도 했다.

남강이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동네는 깨끗해졌고, 싸움이 없어졌다. 그후 다시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때도 남강은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똥통 청소를 도맡아서 하였다. 그는 손으로 똥을 만지면서 기도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바라건대 이 문에서 나가는 날 이 백성을 위하여 이 똥통 소재하기를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인간 사랑

유기점의 노동자들은 무식하고 가난하였으며, 천대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일을 해서 몇 푼 벌면 곧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여 탕진해 버렸다. 게으르고 버릇없으며, 싸움질에, 아무런 희망 없는 노동자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남강은 이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장의 시설을 위생적으로 고쳤다. 작업복을 주고, 노동시간을 정했다.휴식시간도 주었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이러한 노동조건 개선으로 노동자들의 삶이 개선되었을 뿐 아니라 작업능률 또한 크게 향상되었다.

오산학교의 한 학생은 지독한 말썽으로 한 두 차례 근신과 정학을 받았음에도 조금도 반성의 빛이 없어 퇴학 처분을 하기로 교사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말없이 듣고 있던 남강은, “사나운 망아지라야 길들이면 명마가 되는 거요. 길들일 가치가 있는 사나운 망아지를 내쫓는 거 더
생각해 봅시다.” 이 한 마디로 그 학생은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3·1운동으로 3년형을 언도받고 민족대표 중 가장 늦게 출옥했다. 남강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출옥하고 자신만 남아 있을 때에도 자신의 석방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기를 하루라도 더 있으면서 형제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남강은 감옥 안에서 신약전서만 백 번 이상 탐독했다. 남강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1919년 2월 초 해 그름에 한 나그네가 남강의 사랑방 문을 두드렸다. 독립선언을 위하여 연락차 상해에서 온
선우혁이란 청년이었다. 남강은 무릎을 치며, “이제야 죽을자리가 생겼구나” 하며 기뻐하며 곧 조카 자경을 불러, “예, 급한 일이 생겨 팔아야겠다. 독립운동에 돈이 있어야 하니 나부터 내야겠다” 하며 여덟 마지기 땅을 팔게 했다.

3·1운동의 계획이 추진되고 있던 1919년 2월 14일 평양에서 몇몇 목사들을 만나 거사에 참여하기를 청했으나 그들이 종교인임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그는 책상을 내려치면서,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느냐!”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 후 2월 27일 남강이 서울의 정동교회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서는 기독교 측의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 서명을 위해 문안을 돌려보던 중 서명 순서를 놓고 천도교 대표보다 먼저 서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논란이 분분했다. 남강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앉으며 말했다. “순서는 무
슨 순서야. 이것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남강은 자신을 위해 사는 작은 나(小我)의 삶에서 솔선수범, 인간사랑, 비이기적인 헌신으로 큰 나(大我)의 삶을 산 참 지도가가 되었다. 어느 해인가 한강 둑이 터져 고양 지역에 홍수가 났던 때가 있었다. 온 천지가 물바다였던 그 때 지역 수재민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다름 아닌 물이었다. 정작 물천지에서 마실 물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홍수 속에서 마실 물 찾는 것처럼 “참 사람,” “참 지도자”에 대한 절실한 갈망의 몸살을 앓아 온 지 오래되었다. 오늘날 남강이 깨어난다면 다시 빗자루를 들고 우리의 잠든 양심과 양식을 일깨우고, 안일과 무관심, 이기심과 분쟁, 갈등으로 갈라진 마음과, 부도덕으로 썩어가는 마음들을 쓸어내려 하지 않았을까?

출처:http://www.geulmaru.co.kr/bbs/board.php?bo_table=history_column&wr_id=8